맨위로가기

산 조반니 세례당 (피렌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산 조반니 세례당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세례당으로, 4~5세기 경에 기원하여 현재 건물은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세 개의 청동 문 중 로렌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리며, 1401년에 북쪽 문 제작 공모전이 열려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세례당 내부는 팔각형 구조로, 흰색과 녹흑색 대리석으로 장식되었으며, 13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 천장화 '최후의 심판'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 작품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세례당 - 산 조반니 세례당 (피사)
    이탈리아 피사에 위치한 산 조반니 세례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해 고딕 양식으로 마무리된 건축물로, 흰색과 회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내부는 단순함과 웅장함이 조화를 이루고 기울어진 상태의 돔은 독특한 음향 효과를 제공한다.
  • 피렌체 대성당 - 조토의 종탑
    조토의 종탑은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의 종탑으로, 조토 디 본도네가 설계를 맡아 1334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다채색 대리석과 기하학 무늬, 조각상 등으로 장식되었으며, 현재 7개의 종이 있고 피렌체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산 조반니 세례당 (피렌체)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피렌체 대성당]] 맞은편 파사드
피렌체 대성당 맞은편 파사드
부분적인 내부 모습
부분적인 내부 모습
종류세례당, 미성년 바실리카
종교가톨릭교회
수호 성인세례 요한
건축 양식로마네스크 건축
위치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
주소피아차 산 조반니
웹사이트피렌체 세례당
건축
기공11세기
길이37.0 m
32.5 m
최대 높이39 m
재료대리석, 사문암, 사암
교구
대교구피렌체 대교구
대주교제라르도 감벨리
역사
관련 인물라니에리 주교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로렌 공녀 베아트리체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데 (가설)
건설 시작1059년
지정
지정 구분세계유산
공식 명칭피렌체 역사 지구
지정 연도1982년 (제6차 회의)
유형문화유산
기준i, ii, iii, iv, vi
지역유럽 및 북미
명칭
이탈리아어 명칭Battistero di San Giovanni

2. 역사

산 조반니 세례당은 4세기에서 5세기경에 처음 지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1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건축물 중 하나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 세례당이 로마 시대의 신전이었다고 믿었지만, 발굴 결과 그 이전에는 다른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9]

세례당의 지붕은 1128년에 완성되었고, 꼭대기의 랜턴은 1150년에, 주교좌가 있는 내진(앱스)은 1202년에 추가되었다. 원래는 근처의 산타 레파라타 교회가 초라해 보였기 때문에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건립되면서 1355년부터 1375년까지 개축되어 세례당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에서 이 세례당을 "나의 아름다운 성 조반니"라고 언급했다.

12세기에 세례당은 당시 가장 부유했던 모직물 상인 조합이 관리하였다.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한 직후, 모직물 상인 조합은 콩쿠르(경연)을 열어 세례당 문을 만들 예술가를 선정했다. 이때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이끄는 군대의 위협이 있었으나, 잔 갈레아초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이후 세례당의 세 번째 문은 도시를 자신들의 공유물로 여기던 부유한 시민들이 추가했다.[35][36]

세례당(북서쪽에서 본 모습), 대성당과 조토의 종탑 맞은편의 '스카르셀라'.


세례당의 등불, c. 1150년 완공.

2. 1. 초기 역사와 기원

피렌체 사람들은 한때 세례당이 원래 로마 사원이었으며, 마르스에게 헌정된 것이거나, 동고트족의 파괴 이후 도시 부활의 잔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세기 발굴을 통해 로마 시대의 다른 구조물인 큰 집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전설은 폐기되었다. 또한 건물 일부 아래에서 7세기경의 거친 돌이 있는 매장지가 발견되었다.[9]

세례당 건설 관련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성 요한 세례자 교회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그 존재를 확립할 수 없는데, 이전 대성당(현재는 산타 레파라타)도 한때 성 요한 세례자 교회로 불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건설 기술과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세례당의 기원이 11세기 또는 12세기에 있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9][10][11] 페르디난도 레오폴도 델 미글리오레의 《가장 고귀한 도시 피렌체》(1684)에 나타난 두 가지 지표는 혼란을 야기했다. 하나는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1059년에 세례당을 봉헌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반이 1128년에 세례당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7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완공 시점의 두 가지 지표에 대해 고민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둘 중 하나가 전부 또는 일부 잘못되었다고 추정했다.

2020년대에 델 미글리오레와 그의 측근의 원고에 대한 기록 연구를 통해 두 주장 모두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세례당은 1059년에 봉헌되지 않았고, 1128년에는 세례반이 도입되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가장 고귀한 도시 피렌체》가 출판된 직후부터 그 오류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으며, 20세기에 한 언어학자는 델 미글리오레가 살비노 데글리 아르마티라는 중세 피렌체인의 존재를 위조했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례당의 연대를 결정하는 것은 건물 자체에 내재된 증거를 더 넓은 맥락과 관련시키는 데 달려 있다. 1930년대에 발터 호른은 피렌체 석조 기술 연구를 통해 세례당 하층부의 사암 구조가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와 산 피에르 스케라조의 후기 부분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두 교회에 대한 문서들은 1060년대 또는 1070년대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1077-1115년으로 추정되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후기 부분만큼 정교하지 않다.[12]

2024년에 발표된 한 가설에 따르면, 산 조반니 세례당은 1070년대 초, 토스카나 변경백국의 통치자였던 로렌의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딸 토스카나의 마틸다, 그리고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73년 사망) 또는 교황 그레고리 7세(1073-1085년 교황 재위)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13] 피렌체는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중요한 행정 및 종교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강력한 인물들은 세례당과 같이 야심차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건물을 후원할 의향과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1072년 또는 1073년에 임명된 피렌체의 주교 라니에리가 건축을 감독했을 것이다. 이 가설은 이 시기에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석조 증거와 근처에서 발굴된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와 일치한다.

이 시기의 기원은 역사적 맥락과 잘 부합한다. 1060년대에 개혁주의 발롬브로사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피렌체의 주교 피에트로 메차바르바가 성직 매매를 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의 비난은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어, 피터 다미안에 따르면, 더 이상 메차바르바가 축성한 성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은 1068년까지 3년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그 해 발롬브로사 형제가 세티모 수도원 앞에서 화형 심판을 받았다. 그의 생존은 주교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메차바르바는 그 해 여름에 피렌체를 떠났다. 기념비적인 새로운 세례당은 피렌체 주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그가 성 토요일에 피렌체 유아들의 공동 세례를 감독하도록 돕는 방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세례당이 로마의 판테온을 언급하는 것은 교황의 연루에 대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11세기에 교회로 개조된 판테온은 가장 중요한 공휴일에만, 그리고 교황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서만 사용되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 대한 교황의 관심은 높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고대 수도와 중세 모방품, 그리고 매우 고전적인 파사드를 갖춘 루카의 산 알레산드로 마조레의 건축을 후원했다. 교황 그레고리 7세가 1073년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를 봉헌한 것은 이교 제단이었던 로마 ''아라''에 기념되었으며, 기독교적 용도로 재사용되었다 (현재는 로마의 산타 갈라에 있음). 교회 시는 교황 그레고리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비유했고, 그레고리 자신은 한 편지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이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넘어섰다고 언급했다. 이 당시 교회는 또한 교황이 로마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상속받아, 독일의 신성 로마 황제와 동등하거나 우월함을 정당화하는 콘스탄티누스 기증을 믿었다. 만약 고대에 대한 관심이 피렌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면, 더 많은 피렌체 로마네스크 교회가 고대 건물을 인용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대신, 세례당의 몇 세대 후에 완성된 내부 갤러리 레벨과 같은 부분은 전형적인 중세 시대의 기하학적 및 형상 장식에 대한 기쁨을 보여주는데, 이는 판테온의 엄격한 내부와는 이질적이다.

이 세례당의 기원은 4세기부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건물은 세 개의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건축으로, 11세기에 기공되었다. 오랫동안 군신 마르스를 모신 로마 신전이었으며, 세례자 요한을 위해 봉헌된 것이라고 믿어졌다.

지붕 부분 전체는 1128년에, 꼭대기 부분의 랜턴은 1150년에, 주교좌가 있는 내진은 1202년에 완성되었다. 산타 레파라타 교회가 초라해 보였기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이곳이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건립과 함께 1355년부터 1375년까지 개수를 하여,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세례를 베푸는 세례당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 세례당에서 세례를 받은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 지옥편에서 "나의 아름다운 성 조반니"라고 이 세례당을 언급하고 있다.

2. 2. 로마네스크 양식 재건 (11-12세기)

피렌체 사람들은 한때 세례당이 원래 로마 사원이었으며, 마르스에게 헌정된 것이거나, 동고트족의 파괴 이후 도시 부활의 잔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발굴을 통해 로마 시대에 매우 다른 구조물, 즉 큰 집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러한 전설은 폐기되었다. 또한 건물 일부 아래에서 7세기경의 거친 돌이 있는 매장지가 발견되었다.[9]

세례당 건설과 관련된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성 요한 세례자 교회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그 존재를 확립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전 대성당(현재는 산타 레파라타로만 알려짐)도 한때 성 요한 세례자 교회로 불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압도적인 학문적 합의는 건설 기술과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세례당의 기원이 11세기 또는 12세기에 있다는 것이다.[9][10][11] 더욱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페르디난도 레오폴도 델 미글리오레의 저서인 《가장 고귀한 도시 피렌체》(1684)에 나타난 두 가지 혼란스러운 지표 때문에 어려웠다. 하나는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1059년에 세례당을 봉헌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반이 1128년에 세례당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7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완공 시점의 두 가지 지표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많은 학자들이 둘 중 하나가 전부 또는 일부 잘못되었다고 추정했다.

2020년대에 델 미글리오레와 그의 측근의 원고에 대한 기록 연구를 통해 두 주장 모두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세례당은 1059년에 봉헌되지 않았고, 1128년에는 세례반이 도입되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가장 고귀한 도시 피렌체》가 출판된 직후부터 그 오류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으며, 20세기에 한 언어학자는 델 미글리오레가 살비노 데글리 아르마티라는 중세 피렌체인의 존재를 위조했음을 입증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세례당의 연대를 결정하는 것은 건물 자체에 내재된 증거를 더 넓은 맥락과 관련시키는 데 전적으로 달려 있다. 1930년대에 발터 호른은 피렌체 석조 기술(석재 절단, 모르타르 사용, 코스 패턴의 정교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세례당 하층부의 사암 구조가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와 산 피에르 스케라조의 후기 부분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 두 교회에 대한 문서들은 1060년대 또는 1070년대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1077-1115년으로 추정되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후기 부분만큼 정교하지 않다.[12]

2024년에 발표된 한 가설에 따르면, 산 조반니 세례당은 1070년대 초, 토스카나 변경백국의 통치자였던 로렌의 베아트리체와 그녀의 딸 토스카나의 마틸다, 그리고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교황 중 한 명인 교황 알렉산데르 2세(1073년 사망) 또는 그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교황 그레고리 7세(1073-1085년 교황 재위)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13] 피렌체는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중요한 행정 및 종교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강력한 인물들은 세례당과 같이 야심차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건물을 후원할 의향과 능력이 있었을 것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도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세례당 내부에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072년 또는 1073년에 임명된 피렌체의 주교 라니에리가 건축을 감독했을 것이다. 이 가설은 이 시기에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석조 증거와 근처에서 발굴된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와 일치한다.

이 시기의 기원은 역사적 맥락과 잘 부합한다. 1060년대에 개혁주의 발롬브로사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피렌체의 주교 피에트로 메차바르바가 성직 매매를 했다고 비난했는데, 특히 그의 아버지가 뇌물을 통해 그의 직위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비난은 피렌체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어, 피터 다미안에 따르면, 더 이상 메차바르바가 그들의 아이들의 세례를 위해 축성한 성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1068년까지 3년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그 해 발롬브로사 형제가 세티모 수도원 앞에서 수도사들의 비난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화형 심판을 받았다. 그의 생존은 주교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메차바르바는 그 해 여름에 피렌체를 떠났다. 기념비적인 새로운 세례당은 피렌체 주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그가 성 토요일에 피렌체 유아들의 공동 세례를 감독하도록 돕는 방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이는 교회법이 요구하는 바이다.

세례당이 로마의 판테온을 언급하는 것은 교황의 연루에 대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11세기에 609년에 교회로 개조된 판테온은 가장 중요한 공휴일에만, 그리고 교황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서만 사용되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 대한 교황의 관심은 높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고대 수도와 중세 모방품, 그리고 매우 고전적인 파사드를 갖춘 루카의 산 알레산드로 마조레의 건축을 후원했다. 교황 그레고리 7세가 1073년 로마의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를 봉헌한 것은 이교 제단이었던 로마 ''아라''에 기념되었으며, 기독교적 용도로 재사용되었다 (현재는 로마의 산타 갈라에 있음). 교회 시는 교황 그레고리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비유했고, 그레고리 자신은 한 편지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이제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넘어섰다고 언급했다. 이 당시 교회는 또한 교황이 로마 황제의 세속적 권위를 상속받아, 독일의 신성 로마 황제와 동등하거나 우월함을 정당화하는 콘스탄티누스 기증을 믿었다. 만약 고대에 대한 관심이 피렌체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면, 더 많은 피렌체 로마네스크 교회가 고대 건물을 인용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대신, 세례당의 몇 세대 후에 완성된 내부 갤러리 레벨과 같은 부분은 전형적인 중세 시대의 기하학적 및 형상 장식에 대한 기쁨을 보여주는데, 이는 판테온의 엄격한 내부와는 이질적이다.

양식적 유사성은 단일 건축가가 피렌체의 산티 아포스톨리 성당과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을 설계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산 미니아토 성당의 평면(1077년 부분 착공)과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1073년에 봉헌한 산타 마리아 인 포르티코 교회가 철거되기 전의 평면의 유사성은 동일한 건축가의 솜씨일 수 있음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세례당 건축가가 로마 교황 수행원 출신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세례당에 삼각형 박공이 있는 창문으로 둘러싸인 둥근 아치형 창문을 포함하는 모티프가 있으며, 이는 스폴레토의 산 살바토레 바실리카 정면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건축가가 움브리아에 갔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세례당의 기원은 4세기부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건물은 세 개의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건축으로, 11세기에 기공되었다.

2. 3. 건축 및 증축

피렌체 사람들은 세례당이 원래 마르스에게 헌정된 로마 사원이거나, 동고트족의 파괴 이후 도시 부활의 잔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세기 발굴을 통해 로마 시대의 다른 구조물(큰 집)과 7세기경의 매장지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전설은 폐기되었다.[9]

세례당 건설 관련 문서는 남아 있지 않다. 성 요한 세례자 교회에 대한 언급만으로는 그 존재를 확립할 수 없는데, 이전 대성당(현재 산타 레파라타)도 한때 성 요한 세례자 교회로 불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계는 건설 기술과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세례당의 기원이 11세기 또는 12세기에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9][10][11] 페르디난도 레오폴도 델 미글리오레의 《가장 고귀한 도시 피렌체》(1684)에 따르면, 교황 니콜라우스 2세가 1059년에 세례당을 봉헌했고, 1128년에 세례반이 세례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2020년대 연구에 따르면 두 주장 모두 정확하지 않다. 역사학자들은 출판 직후부터 오류를 알아차렸고, 20세기에는 델 미글리오레가 살비노 데글리 아르마티의 존재를 위조했음을 입증했다.

1930년대 발터 호른은 피렌체 석조 기술 연구를 통해 세례당 하층부의 사암 구조가 산티 아포스톨리 교회, 산 피에르 스케라조의 후기 부분과 유사하며, 이 교회들은 1060년대 또는 1070년대에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후기 부분(1077-1115년)만큼 정교하지 않다.[12]

2024년 발표된 가설에 따르면, 산 조반니 세례당은 1070년대 초 로렌의 베아트리체, 토스카나의 마틸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 또는 교황 그레고리 7세의 협력으로 시작되었다.[13] 피렌체는 작지만 중요한 행정 및 종교 중심지였고, 이들은 세례당과 같이 야심차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건물을 후원할 의향과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1072년 또는 1073년에 임명된 피렌체의 주교 라니에리가 건축을 감독했을 것이다. 이 가설은 석조 증거와 숯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와 일치한다.

1060년대 개혁주의 발롬브로사 수도회 수도사들은 피렌체 주교 피에트로 메차바르바가 성직 매매를 했다고 비난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더 이상 메차바르바가 축성한 성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세례를 받으려 했다. 1068년 발롬브로사 형제가 세티모 수도원 앞에서 화형 심판을 받아 생존하자 주교의 입지가 불안해졌고, 메차바르바는 그해 여름 피렌체를 떠났다. 기념비적인 새 세례당은 피렌체 주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성 토요일에 피렌체 유아들의 공동 세례를 감독하도록 돕는 방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서쪽에 스카르셀라가 있는 팔각형 평면도


세례당은 평면이 팔각형이지만, 서쪽에 있는 직사각형 ''스카르셀라'' 덕분에 방향성을 가지며 제단을 위한 공간을 찾을 수 있다. 팔각형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세례당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다른 초기 사례로는 밀라노 대성당 아래 4세기 ''팔레오크리스티아노 세례당''과 5세기 라테라노 세례당이 있다. 티모시 베르돈은 "인간의 지상 생활은 7일로 구성된 주와 같이 유한한 시간 단위로 전개되지만, 세례를 통해 신자들은 '여덟째 날'로 들어간다"고 썼다.[14]

판테온의 평면은 원형이지만, 여덟 개의 조각으로 나눌 수 있어 팔각형 건물에 재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이 세례당의 기원은 4세기부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건물은 11세기에 기공된 세 개의 로마네스크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오랫동안 군신 마르스를 모신 로마 신전이었으며, 세례자 요한을 위해 봉헌된 것이라고 믿어졌다.

지붕 부분 전체는 1128년에, 꼭대기 부분의 랜턴은 1150년에, 주교좌가 있는 내진은 1202년에 완성되었다. 산타 레파라타 교회가 초라해 보였기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이곳이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1355년부터 1375년까지 개수를 하여,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세례를 베푸는 세례당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 지옥편에서 "나의 아름다운 성 조반니"라고 이 세례당을 언급했다.

12세기에 건립된 산 조반니 세례당은 당시 가장 부유했던 모직물 상인 조합에 의해 조영, 관리되었다. 콩쿠르를 실시했지만, 흑사병으로 인한 엄청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직후였기 때문에, 주제로 이삭의 희생이 선택되었다.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지휘하는 대군의 접근이라는 위기를 맞이했지만, 잔 갈레아초가 열병으로 급사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모직물 상인 조합은 콩쿠르에 구국적 의도를 걸었다[35]。후 세례당 제3 정문은 도시를 공유물로 생각했던 부유 시민층에 의해 보충되었다. 그들은 도시의 장식에 책임을 느꼈다[36]

3. 외관

최신 연구에 따르면, 산 조반니 세례당은 1080년대 후반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건축은 12세기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조반니 빌라니는 돔 꼭대기의 랜턴이 1150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건축사에서 이 요소의 최초로 알려진 사례이다.[15]

발굴 조사에 따르면 건물은 원래 반원형 앱스를 가지고 있었다. 주세페 리차는 현재의 ''스카르셀라''가 1202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했지만,[16] 그의 기록 보관소 출처는 확인할 수 없다. 1150년 랜턴 설치는 넓은 돔을 전제로 하는데, "성가가 없이는 돔 전체의 안정성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반원형 앱스를 제거하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스카르셀라''는 실제로 1150년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세례당 바닥 아래 두꺼운 벽은 세례당 포장 도로의 가장 안쪽 부분과 비슷한 크기의 내부 팔각형을 형성한다. 이 벽의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현재의 세례당보다 앞선 작은 세례당의 일부였거나,[17] 완전 침례조를 둘러싸고 있었거나,[18] 라테라노 세례당 또는 피사 성묘 교회와 같이 기둥의 고리를 지탱했다고 추측한다.

피렌체에는 현재의 세례당 이전에 세례당이 있었지만, 같은 위치에 있었는지, 아니면 대성당 근처 다른 곳에 위치했는지는 지속적인 논쟁과 조사의 대상이다.

세례당은 초기 역사 대부분 동안 무덤들 사이에 서 있었다. 19세기에도 남쪽 입구는 석관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러한 현세의 죽음에 대한 상기들은 세례를 통해 제공되는 영원한 생명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3. 1. 디자인과 장식

세례당은 평면이 팔각형이지만, 서쪽에 있는 직사각형 ''스카르셀라'' 덕분에 방향성을 가지며 제단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다.[14] 팔각형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세례당의 일반적인 형태였다.[14] 다른 초기 사례로는 밀라노 대성당 아래에서 발굴된 4세기의 ''팔레오크리스티아노 세례당''과 5세기의 라테라노 세례당이 있다.[14] 티모시 베르돈은 "인간의 지상 생활은 7일로 구성된 주와 같이 유한한 시간 단위로 전개되지만, 세례를 통해 신자들은 측정 가능한 시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여덟째 날'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14]

조반니 빌라니는 돔 꼭대기의 랜턴이 1150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했다.[15] 이는 건축사에서 이 요소의 최초로 알려진 사례이다.[15] 발굴 조사에 따르면 건물은 원래 반원형 앱스를 가지고 있었다. 주세페 리차는 현재의 ''스카르셀라''가 1202년에 시작되었다고 기록했지만,[16] 그의 기록 보관소 출처는 확인할 수 없다. 1150년 랜턴 설치는 넓은 돔을 전제로 하는데, "성가가 없이는 돔 전체의 안정성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반원형 앱스를 제거하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스카르셀라''는 실제로 1150년 직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세례당 바닥 아래 두꺼운 벽은 세례당 포장 도로의 가장 안쪽 부분과 비슷한 크기의 내부 팔각형을 형성한다. 이 벽의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현재의 세례당보다 앞선 작은 세례당의 일부였거나,[17] 완전 침례조를 둘러싸고 있었거나,[18] 라테라노 세례당 또는 피사 성묘 교회와 같이 기둥의 고리를 지탱했다고 추측한다.

1320년대, 산 조반니 세례당 (피렌체)의 후원을 받던 강력한 길드인 칼리말라 예술가 조합은 남쪽 문에 세례를 받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들어오는 부모들이 사용했던 문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21] 1329년까지 그들은 150년 전에 보난노 피사노가 제작한 피사 대성당의 당시에는 비할 데 없는 문에 영감을 받아 매우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안드레아 피사노는 베네치아 장인들이 제작하고 그가 금박을 입힌 청동 부조의 밀랍 모형을 만들었다. 문 위에 1330년이라는 제작 시작 연도가 나타나 있지만, 완성하는 데 6년이 걸렸다.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이 프로젝트의 감독을 맡았다고 회상했다.

이 문은 피렌체의 수호 성인인 세례 요한의 생애를 묘사한 20개의 장면을 금박을 입힌 청동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중 많은 장면이 내부 모자이크 천장에 묘사된 그의 생애 15개의 장면이나 최근에 완성된 페루치 예배당에 조토가 그린 세 개의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조지 로빈슨은 이를 "시각적 서사시"라고 칭했다. 왼쪽 문은 예언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역할을, 오른쪽 문은 순교자로서의 그의 운명을 보여준다. 가장 낮은 단에는 용기, 절제, 정의, 신중함의 네 가지 추기경 덕에 대한 우화적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그 위의 인물들은 희망, 믿음, 자비의 세 가지 신학적 덕과 함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고난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 데서 영감을 받은 겸손함을 나타낸다.

안드레아 피사노, 남쪽 문의 세례 요한의 장례식


1세기 이상 후에 로렌초 기베르티의 아들 비토리오의 작업장에서 완성된 문 주변의 프레임은 아담과 이브가 인간의 타락 이후의 모습과 아기 카인과 아벨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 아래에는 세례로 제거될 수 있는 원죄를 상징하는 꽃과 과일이 있다.[24] 세례당 내부는 바닥은 모자이크 무늬로, 벽면은 외장과 마찬가지로 대리석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천장은 13세기의 모자이크화 '최후의 심판' 외에도 성경과 관련된 많은 장면의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천국의 문'


이 세례당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1452년 완성)이 특히 유명하며,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찬한 데서 유래하여 주로 이 이름으로 불린다.[34] 현재 설치된 문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두오모 부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401년, 북쪽 문의 제작자 공모가 공고되었다. 이는 콩쿠르 형식으로 제작자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로, 7명의 기술자와 예술가가 응모했다. 최종적으로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정되었으며, 기베르티가 선정되었다고도, 기베르티와의 공동 제작을 브루넬레스키가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콩쿠르는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북쪽 문은 1403년 11월 23일에 제작 계약이 체결되었고, 1424년 4월 19일에 동쪽 입구에 설치되었지만, '천국의 문'의 완성에 따라 1452년에 북쪽으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세례당 내의 세례반은 1416년에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야코포 델라 퀘르차, 토리노 디 반니, 조반니 투리니에 의해 제작되었다.

  • 북쪽 문 '그리스도의 생애': 로렌초 기베르티, 마솔리노, 베르나르도 디 피에로 추파니, 파올로 우첼로,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 동쪽 문 상부 조각 '예수의 세례': 안드레아 산소비노
  • 남쪽 문 '세례자 요한의 생애': 안드레아 피사노 (1330년1월 22일부터 1336년까지 제작되어 1338년에 동쪽 문으로 설치되었으나, 남쪽으로 옮겨졌다.)
  • '교황 요한 23세 묘비':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파뇨 디 라포 포르티자니 (1425년부터 1428년에 걸쳐 제작)

3. 2. 청동 문



이 세례당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1452년 완성)이 특히 유명하며,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찬한 데서 유래하여 주로 이 이름으로 불린다.[34] 현재 설치된 문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두오모 부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401년 북쪽 문의 제작자 공모가 공고되었다. 이는 콩쿠르 형식으로 제작자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로, 7명의 기술자와 예술가가 응모했다. 최종적으로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정되었으며, 기베르티가 선정되었다고도 하고, 기베르티와의 공동 제작을 브루넬레스키가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콩쿠르는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북쪽 문은 1403년 11월 23일에 제작 계약이 체결되었고, 1424년 4월 19일에 동쪽 입구에 설치되었지만, '천국의 문' 완성에 따라 1452년에 북쪽으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제작자 및 주요 내용

남문
안드레아 피사노, 세례자 요한의 생애 (1330년 1월 22일부터 1336년까지 제작, 1338년 동쪽 문으로 설치 후 남쪽으로 이동)

북문
로렌초 기베르티, 마솔리노, 베르나르도 디 피에로 추파니, 파올로 우첼로,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그리스도의 생애'

동문 (천국의 문)
로렌초 기베르티
동쪽 문 상부 조각안드레아 산소비노, '예수의 세례'


4. 내부

산 조반니 세례당 내부는 바닥은 모자이크 무늬로, 벽면은 외장과 마찬가지로 짙은 녹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천장은 13세기의 모자이크화 '최후의 심판' 외에도 성경과 관련된 많은 장면의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세례당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1452년 완성)이 특히 유명하며, 미켈란젤로는 이를 "천국의 문"이라고 칭찬했다.[34] 현재 설치된 문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401년에는 북쪽 문 제작자 공모가 공고되었는데, 이는 콩쿠르 형식으로 제작자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였다. 7명의 기술자와 예술가가 응모하여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최종 선정되었으며, 기베르티가 선정되었다고도 하고, 기베르티와의 공동 제작을 브루넬레스키가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콩쿠르는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북쪽 문은 1403년 11월 23일에 제작 계약이 체결되었고, 1424년 4월 19일에 동쪽 입구에 설치되었지만, '천국의 문' 완성에 따라 1452년에 북쪽으로 이전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세례당 내의 세례반은 1416년에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야코포 델라 퀘르차, 토리노 디 반니, 조반니 투리니에 의해 제작되었다.

제작자제작 연도비고
북쪽 문 (그리스도의 생애)로렌초 기베르티, 마솔리노, 베르나르도 디 피에로 추파니, 파올로 우첼로,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1403년 ~ 1424년1452년 북쪽으로 이전
동쪽 문 상부 조각 (예수의 세례)안드레아 산소비노
남쪽 문 (세례자 요한의 생애)안드레아 피사노1330년 1월 22일 ~ 1336년 (1338년 설치)동쪽 문으로 설치되었다가 남쪽으로 옮겨짐


  • '교황 요한 23세 묘비' :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파뇨 디 라포 포르티자니 (1425년부터 1428년에 걸쳐 제작)

4. 1. 구조와 장식

세례당은 평면이 팔각형이지만, 서쪽에 있는 직사각형의 ''스카르셀라'' 덕분에 방향성을 가지며 제단을 위한 공간을 찾을 수 있다.[14]

팔각형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세례당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다른 초기 사례로는 밀라노 대성당 아래에서 발굴된 4세기의 ''팔레오크리스티아노 세례당''과 5세기의 라테라노 세례당이 있다. 티모시 베르돈은 "인간의 지상 생활은 7일로 구성된 주와 같이 유한한 시간 단위로 전개되지만, 세례를 통해 신자들은 측정 가능한 시간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여덟째 날'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14]

판테온의 평면은 원형이지만, 여덟 개의 조각으로 나눌 수 있으며, 따라서 팔각형 건물에 재사용하기에 적합하다.

돔형 내부 공간은 웅장한 1층에 기둥이 있는 틈새 공간과 방향성을 강조하는 앱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판테온을 연상시킨다. 11세기와 12세기에 이 크기의 기념비적인 기둥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대 건물, 아마도 현재 피렌체 공화국 광장 부지에 있었던 로마 포럼의 시민 또는 종교 시설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벽면은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짙은 녹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비포라가 있는 더 짧은 갤러리 층은 광범위한 기하학적 및 인물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다.

''스카르셀라''의 제단 모습


세례당의 바로크 조각 장식은 20세기 초에 대부분 제거되었지만,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기증한 주세페 피아몬티니의 세례자 요한 조각상은 제단 왼쪽 틈새에 남아 있다.

대리석 바닥은 기하학적인 것과 비유적인 것을 포함하여 많은 독립적으로 디자인된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1207년에 제작된 산 미니아토 알 몬테 바닥과 유사한 조디악이 한때 천문학적 중요성을 가졌다고 여겨졌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 바닥은 아마도 12세기에 걸쳐 제작되었을 것이다. 17세기 자료에 따르면, 세례를 받기 직전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닥의 남동쪽 구역에 있는 반암 원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14]

세례당 바닥을 올려다본 모습. 팔각형은 첫 번째 세례반의 구획에 해당하며,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아기들이 놓였던 반암 원반이 보인다.


세례당 내부는 바닥은 모자이크 무늬로, 벽면은 외장과 마찬가지로 대리석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천장은 13세기의 모자이크화 '최후의 심판' 외에도 성경과 관련된 많은 장면의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 세례당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1452년 완성)이 특히 유명하며,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찬한 데서 유래하여 주로 이 이름으로 불린다.[34] 현재 설치된 문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401년, 북쪽 문의 제작자 공모가 공고되었다. 이는 콩쿠르 형식으로 제작자가 선정된 최초의 사례로, 7명의 기술자와 예술가가 응모했다. 최종적으로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정되었으며, 기베르티가 선정되었다고도, 기베르티와의 공동 제작을 브루넬레스키가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콩쿠르는 르네상스 미술의 시작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된다. 북쪽 문은 1403년 11월 23일에 제작 계약이 체결되었고, 1424년 4월 19일에 동쪽 입구에 설치되었지만, '천국의 문'의 완성에 따라 1452년에 북쪽으로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세례당 내의 세례반은 1416년에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야코포 델라 퀘르차, 토리노 디 반니, 조반니 투리니에 의해 제작되었다.

제작자제작 연도비고
북쪽 문 (그리스도의 생애)로렌초 기베르티, 마솔리노, 베르나르도 디 피에로 추파니, 파올로 우첼로,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1403년 ~ 1424년1452년 북쪽으로 이전
동쪽 문 상부 조각 (예수의 세례)안드레아 산소비노
남쪽 문 (세례자 요한의 생애)안드레아 피사노1330년 1월 22일 ~ 1336년 (1338년 설치)동쪽 문으로 설치되었다가 남쪽으로 옮겨짐


  • '교황 요한 23세 묘비' : 도나텔로, 미켈로초 디 바르톨로메오, 파뇨 디 라포 포르티자니 (1425년부터 1428년에 걸쳐 제작)

4. 2. 제단과 세례반

현재는 철거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례반과 그 주변의 팔각형 울타리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으며, 그 조각들은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과 사르테아노의 산 프란체스코 교회에 남아있다.[13]

로마네스크 양식 세례반과 울타리 조각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의 조각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의 조각
----



현재 남아있는 세례당 내의 세례반은 1416년에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야코포 델라 퀘르차, 토리노 디 반니, 조반니 투리니에 의해 제작되었다.

4. 3. 묘비

도나텔로와 미켈로초가 1425년부터 1428년에 걸쳐 요한 23세의 묘비를 제작했다.[34]

4. 4. 바닥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 바닥은 기하학적 문양과 비유적인 문양을 모두 포함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디자인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1207년에 제작된 산 미니아토 알 몬테 바닥과 유사한 조디악(황도대)은 한때 천문학적 중요성을 가졌다고 여겨졌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9] 이 바닥은 아마도 12세기에 걸쳐 제작되었을 것이다. 17세기 자료에 따르면, 세례를 받기 직전에 어른들이 아이들을 바닥의 남동쪽 구역에 있는 반암 원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10]

4. 5. 모자이크 천장

'''모자이크 천장 도면''': '''1.''' 최후의 심판. '''2.''' 천국. '''3.''' 천사들의 합창. '''4.''' 창세기의 이야기. '''5.''' 요셉의 이야기. '''6.'''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이야기. '''7.'''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


산 조반니 세례당은 웅장한 모자이크 천장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는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으로 대략 124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여러 차례 중단되었다.[33] 이 작품은 약 천만 개의 모자이크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6미터 높이의 '심판하시는 그리스도'(1)와 중앙의 우아한 덮개(2)의 적어도 일부를 그린 위대한 예술가는 우피치 미술관의 대형 십자가(434번)로 알려진 익명의 대가로 보인다. 피스토이아의 시립 박물관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에게 헌정된 제단화, 프린스턴 대학교 미술관의 작은 삼면 제단화도 이 화가의 작품이다. 그리스도와 천사, 그리고 다른 천상의 인물들을 묘사한 모자이크의 두 번째 층(3)은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 참전한 두 명의 중요한 예술가인 멜리오레 디 야코포와 코포 디 마르코발도의 작품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멜리오레는 1270년 이전에 그리스도(1)의 왼쪽에 있는 성모, 사도, 천사들을 위한 카툰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작품들은 그가 산 레올리노 성당에 그린 제단화를 연상시킨다.

그리스도는 거대한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며, 이 조각들은 단테가 어린 시절일 때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오른쪽에 있는 낙원은 대부분 정적이며, 몇몇 움직임의 에피소드만 존재한다. 여기에는 무덤에서 여러 벌거벗은 인물들이 나오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맨 왼쪽의 한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준비가 된 듯하다. 다른 구원받은 영혼들은 어린이로 묘사되어 거대한 천사를 따르고, 또 다른 어린 영혼은 낙원의 문 앞에 발꿈치를 들고 서 있다. 멜리오레와 코포 디 마르코발도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이 부분을 디자인하는 데 참여했다.

천장 중앙(가장 오래된 부분)


십자가의 대가(Master of the Crucifix) 434번,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


코포 디 마르코발도와 작업장, ''지옥''


그리스도의 왼편 아래에서 석관에서 나온 저주받은 자들이 등장한다. 악마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며, 지옥은 움직임, 굴곡, 고통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코포 디 마르코발도는 이 장면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디자인했는데, 여기에는 심판하시는 그리스도를 패러디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 사탄의 혐오스러운 모습도 포함된다. 코포의 작업장, 그의 아들 살레르노 디 코포를 포함하여, 나머지 부분을 구성했다. 미클로스 보스코비츠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지옥은 불을 뿜는 바위산의 황량한 풍경으로 상상된다. 그것은 작은 악마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을 운반하고 가장 다양한 고문을 가하며, 때로는 요리적인 측면을 띤다. 오른쪽 앞부분에서 꼬챙이에 꿰인 한 남자는 악마가 긴 막대기로 구운 죄인 아래의 불꽃을 지피는 동안, 다른 악마는 기름을 발라주고 있다. 근처에서 다른 악마가 한 죄인의 팔을 붙잡고 머리 위로 육절도를 휘두르며 팔을 절단하려고 한다... 죄인들 중, 신원이 확실한 유일한 사람은 — 캡션으로 확인된 — 장면의 맨 오른쪽 나무에 매달린 유다이다.”

최후의 심판은 돔의 8개 부분 중 3개의 주요 구역을 차지한다. 나머지 5개 부분은 낙원의 문을 마주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캔하도록 의도되었으며, 창세기의 시작(4), 요셉의 생애(5),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생애(6), 그리고 교회의 수호성인이자 도시의 수호성인인 세례자 요한의 생애(7)를 묘사하는 4개의 층을 포함한다.

이 중 첫 번째 부분의 이야기는 아마도 1270-75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재작업과 복원이 이루어졌지만,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의 상층부 이야기는 살레르노, 코포 디 마르코발도의 아들을 포함하는 작업장의 작품인 것으로 보이며, 아래의 신약성경 기록은 치마부에에 가까운 더 자연스러운 스타일을 반영하며, 이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의 십자가 화가와 동일시할 수 있다.

치마부에 자신이 참여했는지 여부는 1920년대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최근의 연구는 미카엘 빅토르 슈바르츠와 미클로스 보스코비츠의 연구를 포함하여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보스코비츠는 그의 손길을 '인간의 타락', '창조주의 책망', '낙원 추방', '형제들에게 팔린 요셉', '요셉의 죽음에 대한 거짓 보고', '이집트로 이끌려 가는 요셉'(가능성 있음), '세례자 탄생과 명명', '광야의 어린 세례자 요한' 에피소드에서 감지했으며, 이 모든 것을 1270년대 중반으로 추정했다. 예를 들어, 그는 '창조주의 책망'에 등장하는 아담의 모습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치마부에의 마에스타에 있는 어린 그리스도의 흉상을 비교한다.

치마부에는 협력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몬텔루포 피오렌티노의 산 로렌초 성당에 서명하고 연대순으로 기록된 프레스코화를 그린 코르소 디 부오노가 그의 뒤를 이었다. 코르소와 그의 작업장은 북동부와 동부 부분의 나머지 에피소드를 담당했다. 남동부 부분의 여러 장면이 1819년에 무너져 재창조해야 했지만, 더 나은 상태의 다른 장면은 코르소와 그리포 디 탄크레디의 손길을 보여준다.

나머지 장면들은 익명의 예술가들, 즉 마지막에서 두 번째 대가와 마지막 대가로 알려진 예술가들에게 귀속되었지만, 보스코비츠는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세 장면을 완성한 또 다른 대가를 식별한다. 그는 부드러운 모델링, 정교한 건축적 설정, 의복의 세부 사항을 근거로 이들의 디자인을 1300년경으로 추정한다.

주요 아치 아래에는 사각형 구멍과 함께 성인, 교황, 주교, 순교 부제의 모자이크 묘사가 있으며, 갤러리 레벨 난간의 바깥쪽 면에는 14세기 초의 족장과 예언자의 흉상이 있다. 관련된 예술가들 중에는 가도 가디와 마지막에서 두 번째 대가가 있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갤러리 내부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먼저 남쪽 문 위에서, 다음은 동쪽 문 위에서 가도 가디와 리포 디 베니비에니에게 귀속될 수 있는 작품이다.

''스카르셀라'' 모자이크는 스타일과 연대순으로 배치하기가 특히 어렵다. 숭배대(chancel)로 이어지는 개선문에는 예언자와 성인들이 나타나고, 그 내부의 아치에는 예언자와 족장을 둘러싸는 거대한 바퀴를 지탱하는 네 개의 텔레몬이 있으며, 중앙에는 신비한 어린 양이 있고, 양쪽에는 세례자 요한과 성모자상이 있다. 보스코비츠는 이 모자이크의 품질을 강조한다.

> "''세례자''의 엄격하고 쇠약한 안색에서 얼마나 엄숙한 표현이 보이는가! 부스스한 머리카락으로 틀을 잡은 젊은 ''타데우스''의 얼굴에서 얼마나 감동적이고 떨리는 연민이 느껴지는가! ''성 토마스''의 머리 모델링에서 빛과 어둠의 조화는 얼마나 풍부한가! 섬세한 음조로 표현되고 눈부신 하이라이트로 생기를 불어넣어진 ''성 바울''의 날카롭고 강렬한 얼굴을 특징짓는 데 얼마나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는가!

치마부에 (attr.), ''창조주의 책망'', c. 1275


치마부에 (attr.), ''세례자의 탄생과 명명'', c. 1275


다양한 대가들의 디자인을 실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한 문서에 따르면 빙고와 파초라는 두 명의 모자이스트가 전문적이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작업장에서 추방되어야 했으며, 베네치아 또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숙련된 모자이스트를 긴급하게 찾아야 했다.

2023년부터 모자이크 천장은 다시 복원 공사 중이며, 2028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참조

[1] 간행물 'In sul fonte del mio battesimo': Dante's baptismal font in an unknown floor plan of the Florentine baptistery 2021
[2] 서적 The Baptistery Pavement Paolucci 1994
[3] 서적 The Baptistery of San Giovanni in Florence Mandragora
[4] 서적 Cosimo I de' Medici and his Self-Representation in Florentine Art and Cul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문서 Paradiso, Canto XXV, lines 8-9, Mandelbaum translation
[6] 서적 Le mura di Firenze da Arnolfo a Michelangelo Pontecorboli Editore
[7] 뉴스 Nuova Cronica Giovanni Villani
[8] 웹사이트 Lives of the Artists https://en.wikisourc[...] Vasari
[9] 서적 The Baptistery of San Giovanni: A Religious Monument Serving the City Paolucci 1994
[10] 서적 Romanesque Architecture: The First Style of the European Age Yale University Press 2014
[11] 간행물 Battisteri o cappelle palatine? Nuovi studi sulle grandi chiese battesimali dell'XI secolo: Arezzo, Lucca e Firenze 2019
[12] 간행물 1938
[13] 서적 Il battistero di San Giovanni, un enigma fiorentino: Studi, leggende e verità da Dante a Ken Follett Angelo Pontecorboli 2019
[14] 서적 The Baptistery of San Giovanni: A Religious Monument Serving the City Paolucci 1994
[15] 백과사전 Light and Rain: The Invention of the Dome Lantern in 12th-Century Florence Phoibos Verlag 2022
[16] 서적 Notizie istoriche delle chiese fiorentine divise ne' suoi quartieri Stamperia di Pietro Gaetano Viviani
[17] 간행물 A Baptistery below the Baptistery of Florence https://www.jstor.or[...] 1976
[18] 서적 Battistero di San Giovanni a Firenze Polistampa
[19] 뉴스 Nuova Cronica Giovanni Villani
[20] 웹사이트 Polo Museale Fiorentino - Catalogo delle opere http://www.polomusea[...]
[21] 간행물 2013
[22] 서적 Andrea Pisano und die toskanische Skulptur des 14. Jahrhunderts Bruckmann
[23] 서적 The Sculpture of Andrea and Nino Pisano Cambridge University Press
[24] 간행물 Baptism and the frame of the south door of the Baptistery, Florence 2009
[25] 간행물 1980
[26] 간행물 1980
[27] 간행물 1980
[28] 웹사이트 Plaster Casts - Vassar College Encyclopedia - Vassar College http://vcencyclopedi[...] 2021-04-15
[29] 웹사이트 Architecture of the Harris building https://www.theharri[...] 2022-10-03
[30] 웹사이트 Gates of Paradise to be Installed at Nelson-Atkins https://www.nelson-a[...] 2018-10-11
[31] 웹사이트 Lives of the Artists https://en.wikisourc[...] Vasari
[32] 서적 Firenze ai tempi di Dante Bemporad
[33] 간행물 2007
[34] 서적 欲望の美術史 光文社
[35] 서적 パトロンたちのルネサンス:フィレンツェ美術の舞台裏 日本放送出版協会
[36] 서적 パトロンたちのルネサンス:フィレンツェ美術の舞台裏 日本放送出版協会 2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